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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디지털 시대다. 귀로 듣는 시대가 가고 눈으로 보는 시대가 도래했다. 디지털 시대는 눈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며, 시각적인 것이 우위를 점한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현상에 주목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젊은이들이 그림자를 그림자로 인식하지 않고 그것을 그저 진실로 믿어버린다는 사실이다. 이미지라는 주제는 현대사회를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현대사회를 이미지의 사회라고도 정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미지란 무엇이며 이미지가 어떻게 현대사회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이미지는 인간과 함께 항상 존재해 왔다. 그것은 저 멀리 선사시대 사람들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항상 인간에게 영향을 주며, 또는 영향을 받으며 존재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고찰해 볼 때 이미지와 인간과의 관계가 항상 같은 것은 아니었다. 사실 선사시대, 즉 문자가 발명되기 전에 이미지는 인간의 의식을 통제하는 중요한 기제였다. 그것은 한마디로 ‘마술적인 이미지’라 할 수 있는데, 인간은 그 이미지 속에 살며 마술적인 힘을 먹고 살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벤야민이 지적한대로 점성술이다. 그는 인간은 별자리의 마술적인 힘에 의해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시대에 이미지와 인간은 마술적인 의사소통을 하였다. 인간이 이미지였고, 이미지가 인간이었다. 이러한 마술적인 세계는 문자가 발명되면서 위기를 맞는다. 인간은 이미지를 선형으로 배열하여 문자를 발견했으며, 그것은 마술적 세계를 탈출하고자 한 노력의 산물이었다. 이러한 위대한 발견으로 인해 인간은 역사적 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자신의 삶 속에 주인이 될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인간은 스스로 주체가 되었고, 필연적으로 인간의 나머지는 객체로 환원되었다. 주체와 객체, 나와 대상 간의 이분법적 대립은 그 누구도 원하지 않았지만 인간에게 가장 큰 슬픔을 선사하였다. 그것은 바로 ‘단절’이다.
플라톤의 위대한 인식이 엿보이는 동굴의 비유는 바로 이 ‘단절’을 잘 보여준다. 다시 한 번 간략하게 소개를 해보자. 인간은 동굴 속에 묶인 채 앉아 있다. 그리고 그가 볼 수 있는 모든 것은 동굴 벽면 속에 있는 그림자일 뿐이다. 나와 대상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깊은 계곡이 존재하고, 나는 무엇인가를 어렴풋하게 알 수 있지만 그것은 진짜의 모습이 아니라 그것의 그림자일 뿐이다. 나와 대상은 갈라질 수밖에 없고, 나는 대상의 존재를 이전처럼 알 수 없다. 플라톤은 오로지 진짜 모습은 철학자들만이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플라톤의 관점을 수용하면서도 비판한다. 플라톤은 철학자들이 진짜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했지만 하이데거가 보기에 그것은 거짓이다. 왜냐하면 동굴 속에 오래 앉아 있다가 갑자기 밖으로 나가면 눈이 멀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인간은 영원히 진짜와 가까이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의 용어로 말하자면 ‘존재적인 것과 존재론적인 것의 영원한 단절’인 것이다.
이보다 슬픈 것은 인간은 그것이 그림자일 뿐이라는 것을 모른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그림자를 실체로 인식한다. 가짜를 진짜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아는 자가 성인이고 철학자이다.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그림자일 뿐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 즉 실체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이것이 위대한 깨우침이다.
이러한 슬픔 속에서 이제 인간은 혼란스러움을 경험한다. 왜냐하면 현대사회 속에서 이미지가 그 모습을 다시 드러냈기 때문이다. 인간의 역사적인 사고는 이미지를 다시 역설적으로 불러냈다. 모든 것을 합리화하려는 인간의 역사적 사고는 정확한 인과(因果)의 메커니즘으로 이루어지는 기계를 만들어 냈고, 그 기계 속에서 이미지는 다시 부활하였다. 그것의 최초가 바로 사진이다.
사진기는 인간의 조그마한 조작으로 이미지를 생성한다. 그것도 현실의 것과 거의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종이에 옮겨놓는다. 이것은 일종의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장치라는 의미는 플루서에 의하면 ‘사고를 시뮬레이션하는 유희도구’라고 정의된다. 사고를 시뮬레이션한다는 말은 우리들의 생각을 다시 한 차원 복제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노동이 아니라 유희, 즉 노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사진기를 가지고 일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일종의 놀이요, 여가활동이다.
그런데 한 가지 신기한 점은 사진기가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인간이 직접 만들어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사진기가 어떠한 작용에 의해 조작되는지 그 설계자를 빼놓고는 잘 알 수 없다. 인간은 단지 셔터를 누를 뿐이며 그 속의 활동은 철저하게 가려져 있다. 일종의 블랙박스와 같은 것이다. 이러한 숨겨진 것 속에서 인간과 사진기는 서로 상호작용하여 이미지를 생산한다.
어디를 가나 사진의 모습은 항상 존재한다. 사진의 발명으로 시작한 이미지의 부활은 현대 사회 속 컴퓨터나 TV, 영화 같은 화려한 기술매체들에 의해 절정을 이루었다. 단절 속에 나타나는 마술적인 이미지들. 이것들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영상은 우리일상의 일부분으로 밀접하게 들어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사람들은 때때로 영화처럼 살고 싶고, 내가 영화 속 주인공이 되는 상상을 한다. 영상은 때로는 낭만적으로, 또는 울분을 푸는 대상으로 우리 삶 속에 스며들어 있다. 그러나 초기에 영화를 처음 본 사람들은 하얀 장막 위에서 실제 사람들이 나타나 연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신기해했다. 그들은 이미지와 실제를 구분하지 못해서 기차가 앞으로 오는 장면에서 두려움에 떨며 자신도 모르게 엎드리는 광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또한 그들은 사진 속 인물에게 해가 될까봐 사진을 맘대로 버리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사람들은 이런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영화가 하나의 이미지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이미지를 실제와 연결시켜 생각하지도 않는다. 이제는 디지털 카메라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한다. 이제 영상기술의 발달과 함께 우리의 의식 또한 함께 발달해가면서 서서히 영상은 미래를 예측하기도 하고, 개개인의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기도 한다. 영상 속 장면은 이제 실제가 되어버렸다. 최근 친구를 살해한 한 학생이 <친구>란 영화를 수도 없이 보았다는 매체보도는 이제 영상이 우리 삶의 방향제시뿐만 아니라 그렇게 행동하도록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영상은 가짜와 진짜를 넘나든다. 또한 가상현실이라는 새로운 과학기술은 가상이라는 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도무지 구분할 수 없도록 만들었고, 지금도 그러한 논의는 진행 중이다.
영상의 첫 출발은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은 그림이라는 것이 어떤 대상의 복제물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인상주의 이전에 그림은 사실적이며 인물과 풍경 중심이었다. 어떤 풍경, 인물 등을 과장하거나 주위배경을 생략하고 내용을 축약한 느낌이었다. 따라서 그림은 대상이라는 본질에 대한 분명한 모조이며 그 가치는 진짜만 못하다는 사실이 암묵적으로 인정되었다. 이것은 플라톤의 ‘동굴에 대한 비유’에서 드러나는 영상에 대한 경시와 비슷한 시각이다.
그러나 사진이 발명되면서 영상의 가치는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사진은 실용적이지만 주술처럼 그 대상 모습의 일부분을 간직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변화가 우리의 의식에 미치는 영향은 그림과 다를 수밖에 없다. 이제 사진은 진짜라고 말할 수도 있고, 가짜라고 말할 수도 있다. 아무리 부인한다 해도 사진 속 그 표현대상은 우리의 일부분이며, 그 부분에 관한 한 그대로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사진은 진짜와 가짜의 경계 위에 존재한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의식은 사진을 통하여 그 대상에 대한 지배력을 얻을 수도 있다. 이는 우리가 애인의 사진을 가지고 다니거나, 부모님의 사진을 가지고 다닌다는 사실로 쉽게 증명이 된다. 우리는 그 사진이 있음으로 감정이 교류할 수 있다는 일종의 주술적인 시도 때문에 사진을 가지고 다니며, 그것은 바로 사진을 통한 대상의 지배력 때문에 가능하다.
또한 사진은 현실의 변형을 담당하기도 한다. 있는 그대로 보이지만, 사진이라는 것은 빛과 그림자를 통한 대상의 변형이 가능하다. 예를 들면, 현재의 대상을 과거의 대상과 닮은 심미적 이미지로 변형할 수도 있게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사진은 숨기고 싶은 현실을 확대 고발하거나, 그 반대로 감출 수도 있다. 현실이 아니라 영상이기 때문이다. 이 단계까지 이르면 영상이 현실로 대체되어, 영상이 현실이라고 믿어버리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눈으로 보기 때문에 진실이라고 믿어버리는 것이다. 포이에르바흐의 “현실보다 영상”이 더 현실로 다가오게 된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많은 철학자들이 지적하고 있는데, 한 학자는 이를 시뮬라크르 현상이라 부른다.
좀 더 쉽게 설명해 보면 기술이 발전하고, 디지털 시대로 들어서면서 이제 사람들은 점점 사물보다 모상(模相)을 좋아하게 되었다. 이러한 모상에 익숙해지면서 현실적인 관념은 점차 복잡해지고 약해지게 되어 영화를 실제보다 좋아하게 되고, 사진의 조작을 자신의 실제 모습보다 좋아하게 된다. 이것은 우리의 눈이 그렇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소리의 시대는 가고 눈의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직접 눈으로 보는 것만큼 믿음을 주는 것은 없고 따라서 눈으로 확인하는 영상들, 이미지들은 가짜임에도 불구하고 진짜처럼 인식된다.
가짜가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시대, 바로 그것이 시뮬라크르의 세상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가짜가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을 때 생길 수 있는 문제이다. 이러한 문제를 우리는 나치의 선전영화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레니 리펜슈탈의 영화 <의지의 승리>는 그들의 전당대회의 모습을 촬영한 나치의 대표적인 선전영화다. 이 영화를 살펴보면 우리의 예상과는 다르게 히틀러의 연설은 그다지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노골적인 선전활동을 그들은 배제한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선전을 아주 교묘히 예술적으로 승화시켜서 놓았다. 노골적으로 이성에 호소하기보다는 감각적인 육체적 반응에 더 주목하였다. 공허한 이념을 감출 수 있는 수단을 계속된 운동과 힘의 표현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 영화에서 굉장한 조직력과 지속적인 행동에 의해 군중들은 전당대회에 참석한다. 히틀러는 그가 서 있는 차에서 5시간동안 진행될 퍼레이드를 미리 내다 본다. 나치의 마크인 ‘卍’은 군중과 함께 춤추고 있으며 도시는 ‘卍’의 물결이 넘쳐흐른다. 그리고 광장과 거리는 신나는 행진음악으로 메아리친다. 수많은 군중들과 신나는 행진곡,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쉽게, 그리고 나치에 동화되었다.
‘나치의 세계’는 근본적으로 ‘그림자의 세계’, ‘허상의 세계’였다. 그들은 실제 현실과 유리된, 그러면서도 더욱 현실 같은 이미지를 잘 조합해 냈다. 이미지를 이미지화시키는 예술의 원리를 잘 알고 있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독일의 선전영화는 영국의 영화와는 다르다. 그 당시 영국의 영화들은 보통 이미지를 그대로 이용하여 무엇인가를 보여준다고 믿었다. 독일의 영화들은 영국의 영화들보다 확실히 한 단계 위였다. 그들은 이미지를 이미지화 시켰으며 더불어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해 낸 것이다.
이런 작업으로 인해 그들은 ‘리얼리즘’이라는 구호를 사용할 수 있었고, 실제보다 더욱 실제 같은 가짜에 사람들을 열광시켰다. 크라카우어의 용어를 빌리자면 ‘현실과의 갈등’을 적절히 이용한 것이다. 이것이 나치가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이자 근본 동력이다.
그들에게 영화는 현실을 제거하는 하나의 수단이 되었다. 그들은 전선에서 기자들이 가져다주는 화면들의 기록을 자신들의 의도대로 편집하여 기존의 의미를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들의 현실을 잃어버리고 마는 비참한 상황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나치가 영화를 통한 현실 세계의 제거에 만족했다면 그들의 영화가 그렇게 위력적으로 선전활동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현실 속에 남아있는 무의식적인 활동이 그들의 절대적인 리더십을 계속 위협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투명한 종이에 글씨를 아로새기듯이 사람들의 마음에 그들의 가치를 새로 주입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소독된 사람들의 마음속에 새로운 의무를 부과했다. 그들은 현실의 요소를 강탈하여 전체주의 시스템의 왜곡된 현실로 조작하기도 하였다. 물론 진짜 현실이 남아있을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살아남은 현실이란 나치의 영광에 박수를 보낼 때뿐이었다.
그들의 선전은 현실을 대신하는 일종의 대체물이었던 것이다. 가짜를 진짜처럼 만드는 조작으로 그들은 영화를 사용하였고, 이러한 의미에서 그들의 영화는 무서운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인식해야만 한다. 가짜를 진짜로 알게 되면, 그것은 우리의 진지한 삶의 성찰을 포기하는 행위와 같다. 우리는 가짜를 가짜로 인식해서 그것이 그림자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새로운 나치의 시대를 맞아 이미지의 노예가 되어 자신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가짜를 가짜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올바른 이미지에 관한 가장 큰 교훈이 아닐까?
-출처는 불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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